[스크랩] 송광사에서
순천만에서 송광사로 가는길
네비 여인은 '송광사 '
길이 없는곳이라 표시한
옆차선 아저씨는 낙안읍성길을 따라 가라 한다
꼬불꼬불 벚나무가 아름답게 아치를 만들어주는
지난봄 선암사를찾던 추억의길 이다
송광사 주변을 검색하니
이 네비 여인 신이난다
산길을벗으나
낙압읍성 표지를 반대로 두고 들어선길
오마이 갓 ...
이런 행운이
찰칵찰칵 .....
주암 저수지 ..
송광 초등학교 ...
그리고
이아름다운길 들어서니
목적지 주변입니다 ,,,
송광사
반가운 손짓
비가 온후 라
계곡의 물소리 웅장하고
쭉쭉 뻗은 나무
시원한 바람소리 따라 ..
아름드리 나무는 탄성을 지르게 하고
나무는 가슴을 벅차게 한다
시원한 물소리
시원하게도 흐른다
이 아름다운 곳 두고 어찌 갈꺼나
한세상 사는것 마음껏 사랑하고 가자
한세상 사는것 / 이외수
그대여
한세상 사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기도소리 ..
조용하다
베롱나무
저 희안한 녀석은 뭔고
밥통 밥통이란다
넉넉함
샘물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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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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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홈페이지 에서 이렇게 소개를 한다
떠나기 싫은 마음
마당에 앉았는데 ...
나비녀석 날 따라 하네
나비야 너도 좋으니
나비야 청산가자 벌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꽃잎에 쉬어가자
꽃잎이 푸대접을 하거들랑
나무 밑에 쉬어가자 나무도 푸대접 하면
풀잎에 쉬어가자
아름다운 사랑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