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매창, 유희경 & 직소폭포 : 부안삼절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부안삼절 : 매창, 유희경 그리고 직소폭포
황진이黃眞伊와 박연폭포朴淵瀑布 그리고 화담 서경덕徐敬德을
송도삼절이라고 부른다.
개성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당시 개성의 명사인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와
명유名儒 서경덕을 유혹하였는데,
지족선사는 그녀의 유혹에 빠져 파계를 하였으나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인이 서경덕의 고매한 인품과 절개,
황진이의 뛰어난 미모와 기예,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데 묶어 송도삼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전라북도 부안에도 부안삼절로 불리는 것이 있다.
변산반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직소폭포는 변산팔경의 하나이다.
부안출신의 문인 신석정은 직소폭포. 기생 매창 그리고 유희경... 이 셋을 일러 <부안3절>이라고 하였다.
@ 직소폭포
직소폭포는 높이 30여m에 이르는 암벽단애岩壁斷崖 사이에서 흰 포말을 일으키며 쉴 새 없이 떨어져
아래의 소沼은 약 직경이 50m이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이 소를 실상용추라고 하는데, 다시 제2, 제3의 폭포를 이루며
이곳을 지나 분옥담, 선녀탕 등의 경관을 이루는데, 이를 봉래구곡蓬萊九曲이라 한다.
매창이야기 --- 매창, 유희경 그리고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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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기를 넘나든) 조선의 사랑 / 지은이 : 권현정 / 현문미디어
* 매창 :
1573년(선조 6)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불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자라면서 시서화와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되고 나서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부안의 명기로 소문이 났다.
부안의 삼절 (직소폭포, 매창, 유희경 ---부안출신 신석정이 말하다)인 조선 최고의 명기.
허난설헌, 이옥봉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 - 허균의 누이, 이옥봉 - 허균이 조선의 천재 시인이라고 평가한 사람)
그녀에게는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천민 출신의 대시인 유희경 - 매창의 첫사랑,
또 다른 남자는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 - 10년간 우정을 나눈.
* 매창의 시..........
부안의 명기 매창은 여러 시를 지었다.
[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너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시가 바로 이 작품이다.
가슴 찢어지는 이별의 순간과 이별 후에 찾아오는 애달픈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한
가히 이별가의 으뜸으로 삼을 만하다.
@ 매창공원 안에 있는 시비詩碑....
매창은 결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다.
술에 취해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 취한 손님이 내 저고리와 옷자락을 잡았는데 醉客執羅衫
손님 손길 따라 저고리가 찢어져버렸네 羅杉隨手裂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쉬울 게 없지만 不惜一羅杉
님이 주신 정까지도 찢어지지 않았을까 두려워라 但恐恩情絶 ]
매창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한 남자가 찾아 왔다.
매창을 술자리로 불러내어 시를 지어 읊은 후...
매창이 곧 그 운을 받아서
[ 평생 남의 밥 얻어먹으며 사는 일 부끄러워 平生癡學食東家 @ 癡 어리석을 치
오직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사랑했었지 獨愛寒梅映月斜
세상 사람들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을 時人不識幽閑意
마음대로 손가락질하며 들고 나는구나 指點行人枉自多 ] @ 枉 굽을 왕
라고 응답하였더니,
남자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기생의 신분을 벗어나 매화에 비치는 달그림자처럼 절개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
매창은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하고 또 사랃받고자 했다.
뭇 남자들의 연인이어야 할 기생이 한 남자만의 여인이고 싶어하다니...
매창은 차가운 현실에서 매번 상처를 받았다.
첫사랑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 첫사랑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 매창의 첫사랑...........
18살이던 1590년,
한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 찾아왔다고 했다.
매창 : 그러면 유희경 어르신과 백대붕 어르신 가운데 어느 쪽이십니까?
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또 다른 천민 출신의 시인 백대붕의 이름마저 알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기생이다.
* 촌은 유희경 ---------
천민 출신으로 고위관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살아생전에 종2품 가의대부에, 사후에는 한성부윤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유희경의 그의 아버지가 죽자 3년상을 치렀다.
학자인 남언경이 이를 알고 크게 감동해서 유희경을 제자로 받아들여 주자가례를 가르쳤다.
유희경은 명망 높은 시인 박순을 또 한명의 스승으로 만났다.
유희경을 시재가 비범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고 한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싸워 그 공으로 면천을 하고, 관직을 가진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하였다.
유희경(40대 중반)은 매창의 빼어난 거문고 솜씨와 청아한 노래 가락, 듣는 이의 영혼을 뒤흔드는 시심에 ,
그때까지만 해도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던 유희경은 비로소 파계를 하게 된다.
[ 계랑(매창)에게 주는 시 贈癸娘
일찍부터 남쪽 나라 계랑 이름을 떨쳐 曾聞南國癸娘名
글재주 노래 솜씨 한양에까지 자자하네 詩韻歌詞動洛城 @ 洛 물 낙
오늘에야 진짜 모습을 만나고 나니 今日相看眞面目
선녀가 떨쳐입고 지상으로 내려온 듯하네 却疑神女下三淸 ] @ 却 물리칠 각
매창과 유희경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유희경은 매창의 시심을 한 차원 끌어 올렸다.
유희경은 한 달 동안 부안에 머물면서 매창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흔적을 남겼다.
다시 찾아 오겠다는 약조를 남기고 유희경은 한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 두 사람의 재회는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유희경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면천을 받아 관직에 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매창은 유희경이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마음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매창은 마음에 스스로 상처를 입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넘어 가슴에 맺힌 서러움과 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 스스로 한스러워 自恨
봄날이 추워 얇디얇은 옷을 꿰매는데 春冷補寒衣
창가에 햇빛이 비치고 있네 紗窓日照時
머리 숙여 손길 가는대로 맡기어보니 低頭信手處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에 젖어드네 珠淚滴針絲 ]
한양에 있던 유희경도 매창을 잊은 건 아니었다.
신분을 뛰어 넘은 출세에 관직을 등한시 할 수 없었다.
[ 계랑(매창)을 그리워하며 懷癸娘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娘家在浪州
나의 집은 한양에 있어 我家在京口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네 相思不相見
오동나무에 비 내릴 대마다 애끓는 마음 腸斷梧桐雨 ]
이렇게 매창은 무려 10년이나 유희경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상처 투성이가 되어 버린 매창이 또 다른 상처투성이의 허균과 만났다.
* 허균과의 만남..........
1601년 7월 23일, 허균의 나이 32살, 매창의 나이 28살.
허균이 부안에 부임해 가서 기녀를 불러들였다. 허균은 천하의 방탕아라는 소문이 있었다.
매창이 방으로 들어 왔다.
허균 : 자네가 조선의 사내들을 웃고 울리는 천하 제일의 명기라고 하더니만,.... 허튼 소리였군.
아무리 뜯어보아도 천하절색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로다.
매창 : 이미 퇴물이 된 노기 주제에 어찌 명기 소리를 듣겠습니까.
저는 대감이 허망한 소문에 기댈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균 : 어허! 얼굴과는 사뭇 다른 말솜씨로다!
매창 : 송구하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비루한 소리 한 자락을 올려 용서를 구하지요.
매창의 거문고 소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어울려 기가 막힌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 허균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허균 : 너에 대한 소문은 이리저리 바람에 떠도는 허튼 소리가 아니로구나.....
좀 전에 너를 놀린 일을 너그러이 용서하거라
매창 <참으로 알 수 없는 남자다.
만나자마자 자신을 희롱하더니, 또 단박에 용서를 빈다.
거칠 것 없는 사내로구나>
매창은 허균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남자에게 호락호락 마음을 주는 매창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매창은 허균 앞에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날 허균은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매창에게 거문고를 청하고,
연주가 일단락되면 허균은 답례로 시를 지었고,
매창은 또한 그에 대한 답례로 시를 지어 읊었다.
허균은 매창이 천하의 예인임을 감지했고,
매창은 허균이 조선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불후의 천재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문고와 시로 풍류를 즐겼던 두 사람...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
이 규칙은 그들의 헤어짐까지 변함없이 지켜진다.
* 유희경과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
유희경이 15년만에 부안으로 매창을 찾아와 10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리고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한양으로 돌아 갔다.
기약없이 기다리는 매창이 가여워서...?
매창과 허균의 각별한 우정알고...? 유희경은 명문 사대부 출신에다, 천재적인 문재를 타고난 허균을 질투했을까?
* 매창과 허균...............
매창 : 왜 이다지도 아픈 겁니까? 살아 있다는 것이...
허균 : 우리가 숨쉬고 있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네. 하지만 고통을 덜 수 있는 길은 있지.
매창 : 세상에 그런 게 있기는 한 겁니까?
허균 : 끊임없이 나 자신과 대면하는 일! 그것이 바로 참선이지.
매창 : 참선을 하면 정말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허균 : 벗어날 수 없다니까. 그냥 고통을 참는 방법을 알려줄 뿐이지.
매창은 현실에서 지울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참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매창의 죽음..................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고독과 절망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시를 짓는다.
[ 새장에 한 번 갇히니 다시는 못 나가오
곤륜산 높은 낭풍봉이 어디에 있소
푸르른 들에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둡고
구령산에 밝은 달이 꿈속에 넋마저 괴로워라
야윈 모습으로 홀로 수심 깊어 서 있는데
황혼에 까마귀 나무 가득 지저귀고
긴 털과 병든 날개 죽을 때를 재촉하니
구슬피 울며 해마다 깊은 못을 생각하네 ]
1610년 매창은 38살이 되던 해 봄,
부안의 한적한 바닷가에 움집을 빌려 혼자 지내기 시작한다.
겨울부터 시름시름 앓았으나 정확한 병명는 밝혀지지 않았다.
< 어차피 목숨을 받고 태어난 이상 소멸은 정해진 이치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세상에 흔적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처량하고 슬플뿐이다.
어차피 온전하게 기댈 장소도, 또 기댈 사람도 없다면...
혼자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 >
그해 여름 움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허균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두 편의 시를 썼다.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펼친 듯하고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흩어버리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더니
선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버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 있어
이듬해 작은 복사꽃이 피어날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오리요 ]
[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꽃잎 흩날릴 때 한이 쌓이네
난초가 시들 때 상심 쌓이네
봉래섬에 구름,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푸르른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
앞으로는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앙상한 버들이 그늘을 만들지 못하겠지구려 ]
매창이 죽어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묻혔다.
매창의 시신이 묻힐 때 평생 동안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안의 관아의 관리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매창의 시 58수를 모아 [매창집]을 간행했다.
매창이 묻힌 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르는데,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에서 공연을 할 때면 매창의 무덤을 먼저 찾아가서 한바탕 놀아주었다고 한다.
@ 매창공원안에 있는 매창의 묘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