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천 신륵사 神勒寺
제천 신륵사 神勒寺
제천 신륵사 :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창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60년에 법당인 극락전을 중수하면서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4년(58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후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원효대사가 고쳐지었고,
고려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 사명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 기록과 함께 절에 남아있는 삼층석탑과 석재 및 극락전으로 미루어볼 때
신륵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고려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걸친 연혁은 전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되었는데,
창건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중건되기 전까지 상당히 오래 동안 폐사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에 한국전쟁으로 퇴락한 극락전을 중수한 바 있고,
1981년에 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보수한 바 있다.
이후 근래에 들어와 2001년에 산신각을 창건한 것을 비롯해 약사당과 요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신륵사에는 지정문화재로 극락전(시도유형문화재 제13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296호)이 있다.
신륵사삼층석탑 : 보물 제1296호
극락전 앞마당 중앙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의 이형적인 석탑양식을 계승한 삼층석탑으로 정상부분에는 원형의 상륜부가 남아있다.
간결한 구조와 장중한 양식이 조화된 이 탑은 높이가 4m이고, 1.46m의 장방형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이 올려져 잇으며,
불국사의 석가탑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하고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1981년 4월에 해채 복원하였는데,
기단 내부에서 높이 3.5~5cm의 108개의 흙으로 만든 소형 탑과 2개의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탑은 2중기단, 3층의 탑신과 옥개,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석은 각 면에 1개 씩 모두 4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와 탱주를 새겨 각 면을 2간으로 나누었다.
갑석은 3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윗면에 완만한 구배를 두었고,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상층기단의 받침으로 삼았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모두 4장의 판석으로 만들었고, 우주와 탱주를 새겨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각 면을 두 간으로 나누었다.
갑석은 3장의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상면에 구배를 두고 2단의 쇠시리로 탑신받침을 삼았다.
탑신과 옥개는 각 1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탑신은 각층이 동일한 형식으로 2층에서 높이를 많이 줄였으며, 우주만 돋을새김 했을 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을 만들었으나 물끊기 홈은 두지 않았다.
처마는 얇은 편으로 아래 면은 수평선, 윗면은 반곡된 곡선으로 만들었다.
상면에는 1단의 쇠시리를 두어 상층탑신의 받침으로 삼았다.
상륜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방형의 노반, 반구형의 복발과 그 위의 앙화, 그리고 4층의 보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것으로 안정된 조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층이 되어 약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시대는 신라 전성기에서 조금 내려온 것으로 보이며,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탑은 신륵사의 연혁과 관련하여 신륵사가 적어도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신륵사 극락전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신륵사의 주존불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에 있다는 부처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소망을 품은 부처로이 부처를 염念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로 간다고 한다.
좌우에 협시로 지장과 관음보살을 모셨다.
아미타여래는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어깨가 좁고 상체가 긴 편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극락전 -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극락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맞배집으로
주초석은 자연석과 석탑의 옥개받침 등 탑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둥은 민흘림 원기둥으로 세워져 있으며 지붕가구는 1고주 5량가로 되어 있다.
공포는 다포계로 기둥 상부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간포는 어칸에 3구, 좌우 측면 칸에 2구씩 배치했으며
초가지는 외부에서 연봉을 초각한 앙서로 1, 2제공을 구성하고 3제공은 수서로 조각했다.
보머리는 봉두로 조각했고 내부 살미는 연봉으로 조각하였다.
이 건물은 고색창연한 금단청을 볼 수 있으며
내외 벽면과 반자에는 수많은 탱화들로 가득 메워져 있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 아미타불,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중생을 인도한다.
* 신륵사 극락전 외벽 벽화 :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
극락세계 왕생에 대한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상징화한 반야용선般若龍船
중생을 고통의 세계로부터 피안彼岸의 세사으로 건너게 해 주는 도구가 배이며
이 배를 용이 호위하므로 반야용선이라고 한다.
이 용선이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혜를 깨달아 저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신륵사 극락전 벽화의 반야용선도
- 작은 반야용선 : 본선을 따라 많은 무리의 중생을 태우고 함께 가는 것이 이채롭다.
큰 반야용선에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인로왕보살(선수), 대원본존지장보살, 인선관음 등이 타고 있다.
龍船의 앞 선두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맨 뒤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육환장을 들고 계신다.
지장보살은 육도윤화의 세계에 몸을 나투어 주생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보살이다.
배의 중앙에는 비구, 선비, 양반, 여인, 노인 등의 사람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용선에 몸을 싣고 있다.
앞뒤에 큰 돛을 각각 세우고, 전진하는 배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다.
배의 중앙에는 장형帳形 지붕으로 건물을 짓고 보탑寶塔 모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배 아래로는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흰 연꽃을 구름위로 솟아내어 연태蓮胎를 상징한다.
배의 아래에 있는 용의 발이 힘차게 배를 저어가고 있다.
* 극락전 외벽에 있는 [사명대사일본행도] :
사명대사께서 일본으로 가서 임진왜란 전후처리를 하신 것을 그린 그림.
* 항복 받는 모습...
*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맞배집벽에 그려진 그밖의 여러 벽화들...
- 바깥벽에 민화풍 그림 -밤, 대추.. 석류
- 처마밑에 물고기 그림... 먹이 사슬 모양도 있다.
- 혜가단비도
* 후벽의 그림들...
* 신륵사 극락전내
본존을 모신 불단은 격자형으로 나눈 3단의 구성으로 각 격자 안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에는 그림은 없고 격자에 거북 두 마리가 있다.
-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신선들의 그림
본존 위쪽에는 간단한 형식의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천장에는 두 마리의 용을 서로 마주본 모습으로 그렸다.
후불탱화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신장 및 나한을 대칭으로 그렸다.
역시 조선시대 후기의 탱화로 보인다.
- 비천상
- 내벽 반자에 있는 나한그림...
- 보현동자와 문수동자
동쪽 벽 중앙에는 고주 사이에 본존을 모신 불단과 동일한 형식의 불단을 만들어 중단(中壇)을 구성했다.
불단 위의 벽면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그리고 약간의 채색을 한 신중탱을 걸었다.
1987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단 중앙에 화기(畵記)가 있다.
金傅讓國男妹恨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김부가 태조 왕건에 나라를 사양하니 오뉘 한이 맺혔다
太子養兵公主聚 이 곳 월악산 아래 마의태자 군사를 양성하고 덕주공주 백성을 모았다
月岳靈峰法千載 월악 영봉아래 불법이 천 년을 이었으니
不尋神勒薰風吹 신령스런 굴레 찾을 수 없어도 봄의 훈풍은 오늘도 불어온다.
- 내벽의 금각역사와 사천왕...
* 극락전 처마에 달린 풍경...
국사당 局師堂과 반송 盤松 :
* 국사당은 局師堂이라 표기 되어 있는데...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안에 모셔져 있는 영정
# 차량진입급지 표막에 반야용선임을 표시하는 물고기 그림...
이곳을 진입하면 반야용선에 승선하였음을 의미한단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