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및 생활/상식.문화.시사

[스크랩]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 마지막 신라의 비애

호온산업 2010. 12. 25. 16:46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덕주사마애불德周寺磨崖佛 : 보물 제406호.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마의태자의 누이동생인 덕주공주가  오빠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절을 세우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하덕주사 에서 1.6km를 더 올라간 해발 560m의 월악산 중턱 상덕주사에 위치 하고 있다.

월악산의 영봉과 일직선상에 남,북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아래

삼각형 모양의 바위벽에 음각되어 세겨진 불상이다.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가던중

경상도(문경군 마성면) 하늘재에 이르러 머물 때 ,

마의태자의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어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잊지말라>고 하였다.

 

                                                                 * 덕주사마애불

                                                                         - 앞의 예불단 때문에 아래 발부분은 한꺼번에 담지 못했다.

 

 

 

마의태자는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이곳에서 5km떨어진)에 북쪽을 바라보는 미륵불을 조성하고,

덕주공주는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남쪽의 미륵불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을 보내었다.

그것이 바로 덕주사마애불이다.

 

 

 불상은 곧선 모습의 입상으로 얼굴은 두드러지게 새겼지만 신체는 얕게 새겼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 >의 기록이나, 입으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로는

머리가 크고 비만하게 표현된 양식을 살펴볼 때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14.2m, 너비4.2m 에 얼굴의 길이만 하여도 3.4m 인 거대한 불상으로   

후삼국시대부터 고려초까지 충청도에서 유행한 거불거상巨佛巨像의 특징을 따르고 있으며

충주시 상모면 미륵사지의 미륵대원 석불입상과 같은 솜씨의 조각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전체적인 신체의조각 중에서 특히 얼굴부분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넓적한 얼굴과 좁은 이마, 머리위에는 둥글고 넓적한 육계가 있고,

이마 한가운데에 20cm정도의 백호가 선각되었고 커다란 양쪽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짧은 목에 미목구비는 과장된 듯한 표현과 각선이 뚜렸하고,

입체감은 없으나 평편한 신체모습에 형식화된 옷주름이 어울리지 않게 표현된 것은

고려시대 전기의 거불에서 나타난 특징들을 담고있다.

 

눈썹과 눈은 일직선상에 길게 수평으로 그려졌고 눈동자가 표현되지 않아 눈을 감은듯 반쯤 뜨고 있으며

커다란 코 아래쪽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이 선명하다

늘어진 턱아래 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선각 되었으며

얼굴과 달리 몸체의 표현은 신체의 굴곡을 자세히 드러내지 않은 얇은 선각으로 그려졌다.

넓은 어깨를 타고 내린 커다란 양손은 가슴까지 올려 손가락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왼손은 맞대어 손등을 보이고 있다.

 

어깨에서부터 몸 전체로 흘러내린 법의는 허리 아래쪽 으로 타원형 동심원을 그려 강조한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옷주름 형식은 이곳에서 가까운 사자빈신사지 석탑의 비로자나상에서 표현된 기법과 같은 것으로

봉화 의양리 석불입상,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불입상, 함양 마천 마애불입상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양쪽으로 벌어진 발은 크고 길다란 발가락을 밖으로 향하여 연꽂잎으로 선각된 대좌를 밟고 있는데

이러한 대형의 불상들은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많이 조성되었는데,

덕주사마애불 외에도 천안 삼대리 석불입상, 선운사 마애불좌상 등을 들 수 있다.

 

 

 

마애불상이 선각된 암벽에는 모두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가구공架構孔의 용도로 보여 마애불상 앞에는 어떤 형태로든 전각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 마애불 바위의 맨 위에 있는 석탑 

 

 

옛 건물지에 극락전을 복원하였으며,

극락전 앞에 공우탑 功牛塔이 자리하고 있다.  

 

                                                                          * 우공탑 : 마애불 바위 위에 석탑과 닮은 꼴이다.


 

 

# 경순대왕 김부金傅( ?∼979,  신라 제56대왕,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왕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 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 아들은 범공梵空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 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935년 경순왕은

< 이 나라 사방의 땅이 모두 남의 손으로 들어가,

   국력은 약화되고 형세가 고립되어 제대로 부지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전 국토를 바치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자 >고 의논 하는데,

여러 신하들의 가부 의견이 분분하여 끝날 줄을 몰랐다.

이에 왕태자가 말했다.

- 나라의 존망存亡은 필유천명必有天命이라 반드시 하늘의 마련이 있을 터이매,

   응당 충신과 의사들이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해 보는 데까지 해 보다가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어째서 천 년 역사를 가진 나라를 선뜻 남에게 내준단 말입니까?

 

그러나 왕은 끝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 귀순하여 항복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나서 신하를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경순왕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리 휴전선 내에 있으며 항상 참배가 허용된다.


한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뜯어 먹어 가면서 세상을 마쳤다.

범공도 아버지의 투항에 반대하여 서리 푸른 칼날로 인연의 머리를 베어 검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 상덕주사 전경                                

 

 

 

중원미륵사지석불입상 中原彌勒寺址石佛立像 :: 보물 제96호

 

일반적으로 불상이 남쪽을 향해 놓이는 것과 달리, 이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틋한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이 석불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세웠고,

석불은 마의태자 자화상이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덕주공주의 상인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라고 한다.

 

                                                                      * 중원미륵사지석불입상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이유의 또 다른 설명은...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백두산과 만주의 옛 고구려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옛사람은 가고 없으니 누구의 의지인지는 모르겠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바람꽃과 솔나리 블로그입니다.

 

 


 

출처 : 바람꽃과 솔나리
글쓴이 : ma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