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八正道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이 짓는 업보業報 가운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구업口業을 꼽고 있다.
좋은 업, 정업正業을 쌓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구업이 가장 큰 업장業障이다
입으로 짓는 업보의 항목으로는
거짓말 망어妄語와 헐뜯는 말 악구惡口, 이간질하는 말 양설兩舌, 꾸미는 말 기어綺語가 있다.
조심해야 할 일이다.
한번 입으로 내뱉은 말은 빠르게 번진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인 사마駟馬가 쫓아가기 어려운 속도라는 뜻으로 사마난추駟馬難追라 했다.
그래서 말을 하기 전에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타고난 말재간을 지닌 이는 천구天口, 언설言舌이 날카로운 이는 이구利口라 했다.
옛 사람들은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에 대해서 경계했다.
두구杜口, 함구緘口 등은 아예 입을 닫는다 뜻이고, 결구結口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방심放心하여 실언失言을 하고 마는 데 이것을 실구失口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과 경력을 뽐내려 뱉는 말이 요설饒舌이다.
장설長舌은 늘 시비를 부르는 말이다.
그런 데 말은 세 치 혀[三寸舌]에서 나오니 이 혀가 문제거리이다.
요설과 장설 등의 혀는 그 사람이 죽더라도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이 삼촌불란지설三寸不爛之舌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즉 한 치의 쇠붙이 즉 조그만 바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간단한 말이나 문장으로 남을 감동시키거나 남의 약점을 찔러 듣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황簧은 혀와 동의어다.
피리 등 관악기管樂器의 울림대를 일컫는 글자였으나 쓰임새가 혀와 같아 그런 자리에 올랐다.
교묘한 말을 교언여황巧言如簧이라고 적는 이유다.
듣기 좋게 꾸미는 말이 사람을 쉬이 홀린다는 점에서 그런 뜻을 얻었다.
* 양산 통도사 <세존비각>앞에 있는 [팔정도]를 새긴 석등모양의 석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사성제四聖諦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수 주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찾아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가서,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를 설했는데,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제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삼보三寶가 있는 최초의 불교교단이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잡아함경 중 <현성경賢聖經>)
-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知],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괴로움이 사라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1) 괴로움 [苦聖諦]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보통 4고四苦ㆍ8고八苦로 분류한다.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라는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4가지 괴로움에
다른 4가지 괴로움,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해서 8고라 한다.
삶을 받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정든 환경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마지막으로 5온은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괴로움을 늘 겪고 있으면서 인간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불교 수행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인데, 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순간 고통을 여의고 안락함[離苦得樂]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여의고 안심입명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괴로움을 직시해야 한다.
당당하게 괴로움과 맞설 때 그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여 원인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2) 괴로움의 원인 [苦集聖諦]
사성제의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즉 집성제이다.
[집集]이란 <함께 모여 일어난다[集起]>는 뜻이다.
인간의 근본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애착이 모여 괴로운 번뇌가 일어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갈애渴愛]라 한다. 욕망의 갈증과 존재에 대한 애착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좋은 향기, 좋은 맛, 감촉이 좋은 것만을 탐한다.
하나를 충족시키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들어 주면 셋을 요구하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라는 존재가 영원하여 좋은 것을 항상 향유하기를 바란다.
목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이 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유애有愛]이다.
욕애와 유애를 추구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허무를 탐닉하는 것을 [무유애無有愛]라 한다.
쾌락주의의 극치는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에 치우친 태도는 항상 고통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 중에서
- 최초의 진리가 괴로움의 인식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여실히 관찰하고 인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3) 괴로움의 소멸 [苦滅聖諦]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즉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 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진 평온의 경지를 나타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었으니 괴로움도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 이는 이미 중생의 삶이 아니라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성자의 삶이다.
12연기의 역관逆觀의 결과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無常], 생멸, 변화하는 현상들은 갈등과 갈애의 상태를 면치 못하며[苦],
이런 생멸하는 갈등과 갈애의 현상 이면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我]라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적정인 것이다.
괴로운 존재현상을 떠나 어떤 열반적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열반적정이며 해탈이고, 잘못 보면 괴로움이고 번뇌이고 무명無明이다.
멸성제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다음에 살펴볼 도성제道聖諦 즉, 8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다.
4)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苦滅道聖諦]- 팔정도八正道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또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을 말한다.
팔정도는 불교의 종합수행법이며, 불교수행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세월을 통해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계발되고 계승된 불교의 각종 수행법의 토대가 된다.
팔정도의 수행덕목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수행의 핵심 사항들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팔정도의 각 덕목들은 정견을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팔정도 수행의 출발점은 정념이고 그 노력이 정정진이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집중에너지가 형성되면 정정,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정어, 정업, 정명이다.
팔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취해야 할 8가지 바른 자세>를 말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은
정견正見 : 바른 견해를 갖추고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고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고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하고
정명正命 : 바르게 생활하고
정근,정정진正勤, 正精進 : 바르게 정진하고
정념正念 : 바르게 마음을 쓰고
정정正定 : 바르게 삼매(집중)들기를 말한다.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正見이다.
정견은 <바르게 본다> 또는 <바른 견해>라는 뜻으로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 것이다.
정견은 모든 불교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바로 정견이다>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정견은 [8정도 수행의] 시작이다. (잡아함경 중에 <사견정견경>)
그러므로 이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하기 전에 정견을 먼저 확립하도록 가르친다.
정견의 확립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무상과 고와 무아로 보고, 4성제의 관점에서 보아 모두 연기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으로 파악해야 고정된 판단 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견으로 성숙하고, 정견을 통해서 정화될 수 있다.
자유로 가는 길, 즉 명확한 통찰력을 얻는 것을 출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정견은 불교 수행의 첫 걸음으로써 올바른 견해 없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불교 수행의 기초가 된다.
둘째는 정사(유)正思(惟)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으로서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바를 잘 분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이다.
<번뇌에서 벗어난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를 끼치지 않는 생각>으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탐진치 삼독三毒에 물든 생각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울러 온화한 생각, 청정한 생각, 자비로운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즉 정견의 바탕 위에서 자기 생각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하여 그릇된 생각을 지양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셋째는 정어正語로써 올바른 말을 뜻한다.
정견과 정사유에 따라 항상 깨어있는 마음[正念]으로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된 말, 남을 헐뜯는 말, 남을 상하게 하는 거친 말, 쓸데없는 잡담, 이간하는 말, 아첨하는 말과 같은
옳지 못한 언어적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순간 바로 모든 선악시비와 갈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말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잘못된 구업口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서 진실된 말, 남을 이롭게 하는 말, 부드럽게 화합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어이다.
넷째는 정업正業이며 이는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정어에서 의미하는 언어적 행위 외에 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고 술에 취하는 것과 같이 몸으로 행하는 잘못된 신업身業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아울러 생명을 살리고 남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어와 정업은 바른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바른 행위를 뜻한다.
다섯째는 정명正命으로서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규칙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올바른 직업을 통해 정당하게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 수면, 업무와 같이 건전하고 절제된 일상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히는 직업보다는 올바른 직업윤리를 지니고 정당한 직업을 통해 생활하도록 권장한다.
이렇듯 정명은 올바른 가정생활과 직업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정근,정정진正勤, 正精進이며 올바른 노력을 의미한다.
정정진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향해 용기를 내어 물러섬이 없이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즉 모든 괴로움과 번뇌의 주범인 근본 무명을 반야지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탐진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이미 일어났으면 이를 극복하고, 반야지혜를 개발하여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정정진이라 한다.
일곱째는 정념正念으로 바른 깨어있음, 바른 마음챙김, 바른 관찰, 바른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정념이란 4념처(四念處), 즉 신체, 느낌, 마음, 그리고 모든 현상은 항상 변하며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늘 새기며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의 실상을 파악하여 찰나찰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념수행은 단순히 4념처 수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수행법에 적용된다.
염불수행을 할 때는 불보살님의 명호가 생각생각 이어져야 하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화두챙김에 끊임이 없어야 한다.
팔정도의 마지막인 여덟 번째 정정正定은 올바른 정신집중 또는 올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즉 마음을 바르게 한 곳에 집중하여 삼매三昧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정은 올바른 정신집중의 노력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대표적인 불교수행법으로서 여덟 가지 측면에서의 수행을 뜻한다.
이러한 팔정도를 계(戒 : 정어, 정업, 정명), 정(定 : 정정진, 정념, 정정), 혜(慧 : 정견, 정사유) 의 3학三學의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수행 내용에 따라 세 가지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삶과 사물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의 첫 덕목인 정견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듣고 공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즉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중도설, 무아설 등을 깊이 궁구하여 삶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정립하는 것이다.
둘째는 올바른 견해에 근거하여 실천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사유로부터 정정진에 이르는 수행은 사고, 언어, 행동, 생활을 포괄하는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제로 체험하는 수행이다.
정념과 정정이 이러한 체험적 수행에 해당한다.
즉 정념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괴로움과 번뇌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정정을 통해 올바른 정신집중을 하여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적멸한 경지인 삼매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 수행의 완성은 괴로움의 소멸[滅聖諦]이며,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해 있음을 확연히 체득한 것이다.
연기법의 체득은 지혜의 완성이며, 이는 팔정도의 첫 번째 덕목인 바른 안목[正見]을 온전히 갖춘 것이다.
모든 존재가 긴밀한 상호의존관계로 연기해 있음을 확실히 깨달았기에 이를 지혜(智慧)라 하고, 지혜는 자비(慈悲)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지혜의 성취와 자비의 실천은 불교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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