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글/비워내는 마음 낮추는 마음

[스크랩]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호온산업 2014. 8. 27. 19:59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그릇은 가득 차면 넘치고, 사람은 자만하면 잃는다. (省心 下-26

        첨부이미지 조선시대 선조 때의 명신 한음 이덕형이 영의정 자리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마침 임진왜란이 끝난 뒤끝이라 처리해야 할 현안이 산더미 같았고, 또 부서진 궁궐까지 보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한음이 몹시 덥고 목이 말라 잠시 궐 밖의 소실이 있는 집에 가서 마실 것을 찾았다. 그때 소실은 그가 올 줄을 알았다는 듯이 시원한 미숫가루를 재빠르게 대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한음은 얼른 마시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으니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무나.”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소실은 한음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밤새도록 울었다. 이튿날 소실은 이덕형의 죽마고우인 백사 이항복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백사 역시 이런 한음의 뜻을 파악할 길이 없어 직접 한음을 만나 물었다. “그녀는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인이 아닌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치려는 건가?” 그러자 한음은 자세를 바로하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세. 단지 어제의 일을 되새겨 보니 너무나도 영리하고 총명하여 나로 하여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지금 나라꼴이 어떤가? 전쟁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일국의 재상으로 내가 여자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필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네. 그래서 처음부터 유혹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나라일에 전심전력하려는 나의 다짐이라네.” ●첨부이미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흘러와서 이쪽 배에 부딪쳤다면, 아무리 속이 좁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고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빈 배가 아닌 누군가가 그 배에 타고 있다면 소리쳐 피하라거나 물러나라고 할 것이다. 그때 한 번 외쳐서 듣지 않고 두 번 외쳐도 듣지 않으면 세 번째 외칠 때에는 반드시 욕설이 따를 것이다. 아까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아까는 빈 배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도 배와 같아서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누가 그에게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고 해를 끼치겠는가. 세상사의 분란은 모두 사람의 망상과 아집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마음을 겸허하게 비우지 못하면 배에 타고 있는 사람과 같이 마침내 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고 텅 비어있는 사람은 그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안정을 누릴 수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이 없듯이, 욕심 없는 사람에게 비수를 겨눌 수가 없다. 그에게는 빼앗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202

        첨부이미지 출처 > [마음이 여유로우면 모든 일이 쉬워진다] 지은이// 이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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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後感》

        유성 //박한곤

        마침 한가로워 글을 곱씹다 보니 나라 일은 무엇이며? 가정사는 무엇이며? 삶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오늘날 亂離 아닌 난리를 일삼는 사람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지니, 영의정 한음 이덕형이 왜 생각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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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형 <1561~1613 >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 호는 한음 <특징> 이덕형은 이름보다 호인 한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어릴 적부터 오성 이항복과 우정이 깊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성과 한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여 신동이라고 불렸고, 20세에 과거에 급제하면서 벼슬에 올라 나이 31세에 대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을 했다. 이덕형은 학문에 뛰어남뿐만 아니라 외교 능력이 남달랐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명나라를 찾아가 도움을 얻어 내기도 했다.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와준 이유는 일본이 혹시나 중국 땅까지 넘보게 될까 봐 미리 막는 것이었지만, 임진왜란을 빨리 끝나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덕형은 병조 판서가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영의정에 올라 어수선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힘썼다. 그 뒤 1608년 광해군이 왕에 올랐을 때에도 영의정을 맡아 나랏일을 돌보았다. 이때 이덕형은 어려워진 나라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상업과 무역을 활발하게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참고 문헌 //인터넷>

           

      출처 : 좋은글
      글쓴이 : 유성 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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